[서울여노언니WA 인터뷰] 서울여노의 든든한 뒷배, 젠더정책전문가이자 기후운동가 강남식 회원을 만나다

관리자
202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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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노 언니WA 인터뷰]

- 이 인터뷰는 2024년 12월 19일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의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서울여노의 든든한 뒷배, 젠더정책전문가이자 기후운동가 강남식 회원을 만나다.


오름 활동가 : 이사님, 안녕하세요? 서울여노 회원들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언니WA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서울여노 회원 등록 일자가 2008년 2월로 되어 있던데요, 어떤 인연으로 서울여노 회원이 되셨나요?

 

강남식 회원 : 사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왕인순 전 이사장님과의 관계 때문이었을거에요. 정식 회원은 그때쯤이었지만 여성운동가였었고 여성학자로서 여성노동자회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딸가(딸들아 일어나가) 가사에도 있잖아요. 여성해방, 노동해방! 즉, ‘여성해방이 곧 노동해방이다’ 라는 신념이 있었던 거죠. 저도 평우회 출신이었는데 평우회가 해산되면서 여성민우회와 여성노동자회로 대표되는 대중여성단체로 활동가들이 옮겨갔어요. 왕인순 전이사장님은 노동운동으로 저는 대중여성단체로 갔지요.

 

오름 활동가 : 아, 그 유명한 평우회 멤버셨군요. 대학생 시기에는 학생운동을 했다고 하셨는데 노동운동과는 어떤 관련이 있으셨는지요?

 

강남식 회원 :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졸업 후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죠. 저도 그럴 계획으로 현장체험도 하고 동료들과 합숙도 하며 준비했는데.... 졸업직전 아버님이 두달밖에 못사신다는 진단이 나와 아버님 곁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내려간 고향에서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오름 활동가 : 이사님은 어떤 과목을 가르치셨어요?

 

강남식 회원 : 실업계 여고였고 저는 가정과목 담당이었지만 부전공였던 국어과목도 가르쳤어요. 상록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런 작품들을 소개하며 가르쳤어요. 학생들도 그런 교육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인지 반응이 좋았던거 같아요. 늘 인기투표에서 1등을 했어요. (웃음)

 

오름 활동가 : 학교생활은 어떠셨어요?

 

강남식 회원 : 학교 생활은 나름 재미도 의미도 있었어요. 지방 고교로 인프라가 취약해 도서관이 없어 교장선생님께 건의해 도서관도 새로 만들고, 여교사회도 조직해 독서모임도 시작했지요. 그리고 다른 학교에는 다 있는 학생자치활동 시간이 없어 학교측과 담판해 학생들 특별활동시간(CA)도 확보해 내기도 했어요.

 

오름 활동가 : 역시 우리 선배님은 어디 가서나 열 일을 하셨네요.

 

강남식 회원 : 그런데 그때는 다들 열심히 살았어요. 얼마전 모임에서 한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예전에는 6시간 이상 자면 죄 짓는 기분이 들었는데 어제 8시간 잤는데도 아무 일도 없더라구요.(웃음) 그만큼 모두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교사생활 중 대학원에 진학을 했어요. 당시 이대에 여성학과가 막 생겼는데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서울에 올라와 동료들과 활동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고 싶었어요.

 

오름 활동가 :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나요?

 

강남식 회원: 원래 아까 말한 것처럼 80년대 여성운동 구호는 ‘노동해방 여성해방’이었어요. 여성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노동문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석사 논문 주제도 ‘여성 농업 노동자 계급’ 에 관해 썼어요. 그런 관점이 이어져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영국 여성노동운동과 여성노동정책’이었어요.

 

오름 활동가 : 그렇게 여성연구자의 길을 가게 되셨군요. 선배님께서 여성노동자회가 새로운 정책을 만들 때 관련 해외사례나 성인지 관점을 제공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강남식 회원 : 90년대 초반 모성보호법 개정할 때가 생각나네요. 당시 여성노동계를 중심으로 출산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연장하며 새로운 모성보호 담론을 만들어 가며 투쟁했어요. 그때 스웨덴 등 해외사례를 공부하면서 제가 주창한 것이 ‘국가책임론’이었어요. 근데 지금이야 당연하지만 당시 주류 여성학자들 중에서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여성들이 사적 가부장제에서 국가의 공적 가부장제 지배로 들어간다면서요... 즉 사적 가부장제는 이혼이라도 해서 벗어날 수 있는데 모성보호나 육아 등으로 국가 정책, 즉 국가 가부장 체제 안에 들어가면 여성들은 벗어날 수 없는 더 큰 지배를 당한다는 논리이지요. 하지만 저는 모성보호나 육아정책은 국가차원의 정책으로 추진하고, 그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면 국가의 성격을 바꾸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어요. 심지어는 또 다른 편에서는 북한식의 국가 탁아소와 비교하며 빨갱이냐는 비판도 받았어요. 근데 ‘혜영이용철이’ 사건이나 ‘인천세쌍둥이 화재’ 사건들은 모성보호와 보육문제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드러냈어요.

 

오름 활동가 : 90년대 중반이 되면 우리나라 여성정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잖아요. 이사님은 어떻게 활동하셨는지요?

 

강남식 회원 : 95년 9월에 북경에서 제4차 세계여성대회가 열렸어요. 성주류화 전략(GMS)이 채택되고, 한국은 그 도입을 위해 여성발전기본법이 만들어졌어요. 워낙 엉성하게 만들어서 19년동안 20번이나 개정될 정도였지만 그만큼 여성의 역할이나 지위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였음을 반증하기도 하지요. 저는 여성학자이자 실천가로서 성주류화 개념을 전파하고, 젠더관점, 성인지 정책 등을 교육하고 다니느라 무척이나 바빴던 것 같아요. 성주류화정책 소개 전도사가 된 기분이었어요. (웃음) 그리고 여성연합 복지위원장으로서 각종 사회제도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사실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늘 관련 자료를 쌓아놓고 공부해야 했죠. 쉽지 않았죠. 국민연금제도나 자활사업 등의 복지분야에 성인지 관점을 넣기 위해 노력했어요.... 당시에는 근로여성조차 요보호대상자였고, 부녀자, 부녀정책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였으니깐요.

 

오름 활동가 : 부녀자라니...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웃음)

 

강남식 회원 : 결국 21세기 들어와서 사회복지 쪽에서도 여성주의 관점, 성인지 관점이 도입되면서 여성복지론에 성인지 관점이 자리 잡게 되더라구요.

오름 활동가 : 서울여노가 구로삶터자활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초기에 도움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강남식 회원 : 당시는 성인지 관점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시기여서 해외사례를 찾아보면서 자활 기관을 성인지 관점으로 운영해야 한다 것을 강조하면서 여러 모델을 모색했어요. 당시 자활후견기간은 일할 능력이 있는 빈곤여성들에게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어요. 어떻게든 빈곤 여성들이 자활할 수 있는 삶의 체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서울여노가 있는 구로동의 자활센터를 여성 특화로 하자고 했던 것 같아요. 여성특화 자활사업을 모색하기 위해 독일에 방문했었는데 정말 체계가 잘 되어있더라구요. 신규 여성이 유입되면 첫 번째로 거주지 안정을 지원했어요. 그 다음 상담을 통해 그 여성의 능력의 강점을 찾아내서 그 강점을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자활을 돕는 전략이었어요. 그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죠.

오름 활동가 : 개별 여성들의 강점을 함께 찾아내서 집중 훈련한다는 것이 멋진 전략 같아요.

 

강남식 회원 : 네. 우리보다 훨씬 체계가 잘 잡혀 있었지만 해외사례에서도 여성 자활영역은 대부분 봉제, 음식, 청소 등 전통적인 성역활과 관련된 노동영역에 머물러 있었어요. 자전거 수리 등 좀 색다른 영역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수익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 과제로 안고 왔던 기억이 나요.

 

오름 활동가 : 그 후에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후 양평원)으로 자리를 옮기셨죠? 준정부기관에서의 일은 또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강남식 회원 : 당시에 양평원은 개원 초기였기 때문에 성인지정책 교육 체계를 잡고 컨텐츠를 개발하는 등의 역할을 주도하게 되었죠. 사실 성인지 관점이란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았어요. 정부차원에서 관련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지면 양평원에 관련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교육 컨텐츠를 개발해 공무원 교육했어요. 예를 들어 성별영향평가법이 제정되면 성별영향평가 교육과정을 만들고 컨텐츠를 개발하는 식이었죠. 그렇게 한발씩 나아갔지요.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2005년에는 11~12월에는 양평원을 특수법인화하기 위해 국회에서 거의 살면서 작업을 했어요. 다음 해에 예산 작업을 할 때는 두 달 동안 원장님과 작은 플랭카드를 만들어서 관련 의원들을 설득하러 다니기까지 했어요. (웃음)

 

오름 활동가 : 저는 연구자들은 글쓰고 연구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사님은 정말 연구자, 정책가, 교육가, 활동가의 역할을 동시에 하셨네요. 그런 와중에서도 여성노동자회에 든든한 후원자이자 여성노동 정책의 씽크탱크 역할을 해주셨어요.

 

강남식 회원 : 제가 여성노동정책의 씽크탱크였다고 하면 적절하지 않고요. 사안별로 조금 도운 것 뿐이에요.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잖아요. 그 빚과 함께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은 전태일 열사에 대한 마음의 빚(‘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더라면’)도 갖고 있었어요. 저도 그랬지요. 그리고 모든 사회운동이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노동운동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성노동운동 및 여성노동조합 등에 대해서는 더 관심과 애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여노와 인연이 맺어진 이후에도 그런 마음이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서울여노는 특별한 조직이에요. 뭐라고 해야할까 민주화운동 초기시절에 있었던 순수한 공동체성이 많이 남아있는 소중한 곳이에요. 그래서 애정이 더 많이 가는 곳이지요. 사실 마음만큼 지원도 못하지요.

 

오름 활동가 : 이제 2024년을 이야기 할 타임인데 지난 12월 3일 계엄선포로 온 나라가 그야말로 충격에 빠져있어요. 80년부터 여성운동가, 젠더정책전문가로 사셨는데 이번 12.3을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강남식 회원 : 사실 저는 윤석열 같은 자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민주화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는지 정말 인정하기가 어려웠죠. 그럼에도 3년내 퇴진을 목표로 한 운동들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어요. 어떤 더 큰 국민의 희생이 있어야 퇴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게 무엇이 될지는 모르나 저는 국민들이 희생되는 것은 정말 원치 않았어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는 너무 큰 아픔과 고통을 주었잖아요. 그래서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나 극적으로 12.3 계엄이 선포되고 2시간만에 종결되었어요. 그렇게 스스로 자폭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앞으로 탄핵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정말 복잡하고 많은 과제가 남아있겠지만 계엄시에 단 한사람의 희생 없이 끝난 것이 너무나 감사해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그야말로 ‘운’이 민주세력 편이었고 우리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총을 든 군인들 앞에선 젊은이를 봤을 때..... 우린 5.18의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이고, 그때 군인들은 예전의 폭압의 상징인 계엄군의 모습이 아니었잖아요. 5.18, 6.10, 2016년 촛불의 경험이 우리 시민들을, 군인들을 움직이게 한 거에요. DNA에 남은 것 처럼요. 저는 2024년 국회 앞의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제 안에 있던 트라우마를 치유한 것 같아요. 정말 그 밤중에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에게 감동했고 감사했어요.

 

오름 활동가 : 정말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것 같았어요. 트라우마를 사라지게 했다는 이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오래 남을 듯 해요.

 

강남식 회원 : 이후 탄핵 촉구 집회에 참여하면서 또 한번 놀랬죠. 정말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이후 성비 분석한 글이나 기사를 보면서 2030 여성과 남성 비율이 7:3으로 여성들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K-pop 응원봉을 가지고 나와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드는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희망이 생겼어요. 이제 저들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믿고 가면 되겠구나 했어요. 저는 퇴직 후 60+ 기후행동에 참여하면서 젊은 활동가들의 뒷배운동도 하고 있거든요. 그 방향이 맞는 것 같아 더욱 기뻤어요. 물론 지금 상황이 녹녹치 않을 것 같아요. 내란 세력들이 시간을 끌면서 새로운 이슈로 돌파하려고 하는 모습도 보이거든요. 긴장감을 갖고 끝까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야 할 것 같아요.

 

오름 활동가 : 오늘 이사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긴 세월 변함없이 여성운동가로서, 젠더정책전문가로서, 그리고 이제 기후운동가로서 서울여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시는 이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언니WA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2025년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인터뷰 및 정리 서울여노 활동가 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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